일상의 낙서/웃기는 비극

그녀. 웃다.

푸리아에 2004. 6. 19. 03:22

어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주위가 밝게 빛나는것같은 여인을 목격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차분한 생머리

세상의 모든 죄를 용서해줄것만 같이 착하게 생긴 눈

단아한 품성을 나타내는 듯한 흰색 원피스

목욕탕에서 우유마사지라도 한듯한 하얗고 뽀얀 피부

 

완벽이다. 완벽.

 

도저히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처음보는 이성앞에선 왠만해선 말을 하지 않는 소심한 내 성격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비아그라 같은 여인이었다.

 

무작정 앞으로 가서 난 말을 붙였다.

 

"저..저기요.."

"네?"

 

이런 .. 목소리도 이쁘다.

가슴은 쿵당쿵당, 땀은 삐질삐질, 정신은 어질어질 ..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 나이 28살.

가슴시린 첫사랑도 경험했고 하늘이 무너질것 같았던 이별도 경험했다.

말도 못붙이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입이 안떨어질것 같은 긴장감은 처음이었다.

 

차분해야 한다. 차분해야 한다.

이 말을 수없이 머리속에 되뇌이면서 힘들게 입을 떼었다.

 

"지금 몇시에요?"

 

젠장 ..

기껏 용기내서 한 질문이 이게 뭔가.

 

"아 .. 5시 40분이요"

 

이런 .. 더이상 질문할게 없다.

몇초냐고 물어보면 너무 속보인다.

시계 이쁘네요 라고 말하면 시계를 훔쳐갈 소매치기로 보일것 같다.

목소리가 참 좋네요 라고 하면 변태 출현했다고 경찰에 신고할것 같다.

 

어쩌지? 어쩌지? 라고 생각하는 동안 여인은 무심히 창밖을 내다본다.

난 여전히 다음 질문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정적도 잠시 ..

아름다운 여인과 내가 잘되는걸 시기하는 듯한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급출발을 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다음 질문을 생각하고 있던 나.

 

자빠졌다...

大자로 ..

 

젠장 .. 젠장 ..

어떻게 해야 하나 ..

 

나도 틈틈이 처럼 넘어진 상태로 "내 이름은 김종엽(내 친구 이름) 입니다!!" 라고 외칠까.

나의 사랑을 방해한 버스 기사 아저씨한테 달려가 "즐!" 이라고 외칠까.

 

소심한 성격에 이도저도 못하고 주춤주춤 일어나 벌개진 얼굴로 손잡이를 잡는다.

이상하게 생긴 아줌마 옆에 있던 외계인 같은 꼬마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다 아줌마에게 귓속말을 한다.

 

"엄마. 저 아저씨 바보같아."

 

다 들린다.

귓속말은 귀에다 소근거려야 귓속말이라고 하는거다.

시장에서 오징어 팔듯이 소리치는건 귓속말이라 할 수 없다.

 

외계인같은 꼬마녀석 덕분에 버스안에 사람들이 킥킥대며 웃는다.

나의 여인도 웃는다.

 

결국,

그녀가 내릴 때 까지 난 아무데서나 자빠지는 칠칠치 못한 바보같은 남자의 이미지로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잠시후, 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면서 나지막히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안녕. 나의 사랑.

나쁜 버스기사 아저씨와 외계인 꼬마. 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