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낙서/웃기는 비극

생일에 다시 태어난 한 남자의 기록

푸리아에 2007. 7. 29. 23:50

지난 주 금요일.

회사에서 생일 축하 파티를 핑계로 칼 퇴근하여 룰루랄라 하며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집에 가던 중 전 갑작스레 찾아준 급성 장염의 도움으로 뱃속에 고이 잉태하고 있던 아나콘다가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하는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 기운이라는게 보통 기운이 아니었던터라, 식은땀으로 온몸을 충만하게 적시고 있는 상태였더랬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장염으로 인한 고통은 운동선수의 바이오리듬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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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주기 -_-a


날씨도 더웠고, 장소도 지하철 안이라 전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려 애썼어요.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제가 알고 있는 지하철의 화장실 위치를 천천히 기억해내는 가공할만한 위력의 정신력을 뿜어냈던겁니다.

지금 도착한 전철역은 신대방. 신도림 역의 화장실 위치를 잘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자!

인간의 정신력은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해방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쉽게 약해집니다.

더군다나 장염으로 만나게 되는 뱃속의 아나콘다는 임계현상으로 작은 물뱀의 모습으로 밀도가 커지며 분열을 하기 때문에 저의 작고 여린 공간은 찢어질것 같다며 연신 호소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럴수록 전 살아있는 인간 강시라도 되는냥 안색이 점점 파래져 가기만 했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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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염으로 괴로워하는 지하철 2호선의 외로운 강시


신도림을 한 정거장 앞둔 대림역.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까지 와버렸습니다.
내려야한다는 정신 및 육체적 압박감으로 문이 열리자마자 전 조심조심 내렸습니다.

장염 환자에게 닥친 첫번째 위기. 계단이 보입니다.
단전에 힘을 모으고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내려갑니다.
한 아저씨가 바쁜데 왜 앞에서 밍기적 거리고 있냐는 듯이 밉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릅니다. 우어어어.
다시 조심조심 내려갑니다.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화장실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 거립니다.
보입니다. 보여요. 나를 기쁘게 하는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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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는 기쁨에 머리와 몸이 분리된 남녀의 모습


하지만, 그 밑에 조그마한 숫자가 보입니다.
50m ...

하지만 좌절할 수 없었어요. 어떻게 버텨왔는데 .. 한발 한발 온 신경을 모으고 내딛습니다.
입구가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그 모든 무엇보다도 간절하게 원했던 곳.
내 인생의 파라다이스가 눈앞에 신기루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뿌듯했어요. 고통에 굴복하지 않은 제 자신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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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느낌? 으-_-쓱

이제 휴지만 사면 해결.
화장실 앞에 자판기가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구입 가능!
천원 짜리 하나 넣고 버튼만 누르면 땡!!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지갑을 꺼냈습니다. 지갑을 열어보니 만원짜리 세장이 안타깝다는 듯 절 쳐다봅니다.

의식은 몽롱해져만 가고 다리에 힘이 풀립니다. 눈물이 나려 합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던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질 수 없었습니다. 낯선 타지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힘들게 살아도 봤는데. 다시한번 힘을 냈습니다.

옷가게가 보입니다. 힘들게, 정말 힘들게 가게까지 갔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만원 짜리를 내밀며 정말 죄송하지만 돈 좀 바꿔달라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씀드렸습니다.

한국 사회는 정으로 가득찬 사회입니다.
너의 급한 사정 다 이해한다는 듯이 군말없이 5천원짜리 두장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렇죠. 천원 짜리 열장보다는 오천원짜리 두장이 갖고 다니기도 가볍고 좋죠.
근데요 아주머니. 가볍게 들고다니려면 만원짜리 한장이 더 낫습니다. 폼도 나고요.

다시 오천원짜리 내밀면서 천원짜리로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난독증이 있으신지 무언가를 중얼거리시면서 천원짜리 다섯장을 세번이나 세어보시네요.
그냥 천원짜리 한장만 주셔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폐 교환 성공.

다시 나의 파라다이스로 힘겹게 힘겹게 걸음을 옮깁니다.
자판기 앞에 섰습니다. 삶이 나에게 아무리 시련을 주더라도 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젠 정말 자판기에 지폐만 넣으면 땡!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판기에 천원짜리 한장을 넣었습니다.
뱉어냅니다.
다시 넣습니다.
또 뱉어냅니다.
다른 지폐를 꺼내 넣어봅니다.
뱉어냅니다.
.......
천원짜리 다섯장 모두 투입 실패.
.......
눈물이 납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억울한 마음도 듭니다. 얘가 나한테 왜이러나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억울함과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뤄두어야 할 때였습니다.

지폐를 정성스럽게 펴기 시작했습니다.
자판기에 대고 꾸욱꾸욱 눌러서 한국은행에서 막 뽑아낸 새 지폐마냥 빳빳하게 폈습니다.
제 정성에 자판기가 감동했는지 제 돈을 인정해줬습니다!

휴지도 획득. 화장실도 코앞. 이제는 더이상 시련은 없습니다.
내 앞을 막는자는 스파르타 군대처럼 물리치는 기세로 화장실에 돌격했습니다.

첫번째 칸. 사람 있음.
두번째 칸. 사람 있음.
세번째 칸. 사람 없음.

드디어. 드디어. 그토록 제 몸을 떠나고 싶어하던 아나콘다를 방사 했습니다.
그래 그래. 멀리 멀리 가렴.너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그 곳을 찾아 이제 그만 떠나렴.
혼자 떠나기 외로울테니 고통이와 함께 가렴.

고통이와 아나콘다가 떠난 후 너무도 행복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노래를 불렀어요.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전 너무 행복했거든요. 마치 제 2의 삶이 시작된것 처럼요. 그렇게 제 생일에 전 다시 태어났어요.